기장문화원

  • 전체메뉴 아이콘
  • 전체메뉴
위로 가기
  • 홈으로
  • 기장의 역사     >
  • 기장의 유물·문화재
기장문화원 서브탑슬라이드 기장문화원 서브탑슬라이드 기장문화원 서브탑슬라이드 기장문화원 서브탑슬라이드

기장의 유물·문화재

문화재 지도
아래 유물·문화재 이름을 누르면
해당 유물, 문화재의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 기장죽성리왜성
  • 남산봉수대
  • 철마선돌
  • 기장척화비
  • 국수당(國師堂)
  • 옥정사(玉井寺)
  • 임란공신묘
  • 오랑대(五郞臺)
  • 기장읍성(邑城)
  • 비석(碑石)
  • 신라토성
  • 이길봉수대
  • 장안사대웅전
  • 용소골소로
  • 기장죽성리왜성
  • 남산봉수대
  • 철마선돌
  • 기장척화비
  • 국수당
  • 옥정사
  • 임란공신묘
  • 오랑대
  • 기장읍성
  • 비석
  • 신라토성
  • 이길봉수대
  • 장안사대웅전
  • 용소골소로

기장죽성리왜성

기장읍 죽성리 산 52-1번지 일대

기장죽성리왜성 전경
이 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쌓은 성으로 성벽은 3단, 성역은 총 39.929㎡, 성벽의 총 길이는 1km, 높이는 약 4m로써 전형적인 왜성으로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이성은 울산의 서생포성과 학성 그리고 부산성을 연결하는 중간 요충지 역할을 하는 성이다. 당시에 구축된 침투로의 진입로가 구축되어 있었다.
기장읍 죽성리 산 52-1번지 일대로서 남산 기슭의 높다란 구릉지에 있다. 왜성은 서생면 서생리에 있는 서생포 왜성과 그 양식이 비슷하다. 기장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서기 1963. 1. 21 사적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모진 바위돌로서 비스듬히 축조되어 있는데 성벽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성역은 총 11,776평이고 성벽의 총 연장은 약 300m, 둘레는 약 1km, 높이는 약 4km이며 3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전형적인 왜성으로 그 성 안에는 밭이나 공지 등 아무런 시설도 없고 古기와장 파편이 많이 산재되어 있으며 고갈된 井池가 있다. 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가 되는 서기 1593년(선조26년) 6월경 축성되었다고 한다. 기장현읍지의 고적에 "왜성은 현에서 동녘으로 8리에 있으며 古두모포진상에 임진란때 왜가 축조하였는데 견고하고 반원으로 통행하여 지나가도록 되어 있고 상하로 사닥다리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왜성의 구릉지 건너편 야산에 죽성이 있다. 그래서 그 고성을 "죽성"이라 하고 이 왜성은 "기장왜성"이라 함이 옳을 것 같은데 이 왜성을 기장 죽성리성이라 하여 죽성을 무시하였거나 혼돈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측에서는 "기장성"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기록에는 두모포성이라고 되어 있다.

남산봉수대

기장읍 죽성리 산 52번지

남산봉수대
기장읍 죽성리 산 52번지이다. 멀리서 보아도 산봉우리가 뾰족하게 높이 솟아올라 그 모습이 확연하다. 봉화대는 고려(서기 985년 인종 4년)때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실록(서기 1454년)에는 기장현에 "봉화(烽火)가 하나"현에서 동녘 남산에 있다. 서쪽은 동래 간비오(干飛烏) 북쪽은 울산 임을랑포라 하였고 경상도 지리지에는 남산봉수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울산봉수라 하여 역시 간비오와 임랑포에 알린다 하였고, 경상도 읍지(서기 1831년)에는 남산봉수와 아이봉수를 열거하고 경상도여지(1989년)에서는 똑같은 기록과 함께 "경장 후에 폐지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읍지의 군병에 봉군이 그 100으로 되어 있다. 봉수군의 직제는 도별장 1명을 두고, 그 밑에 다시 별장 10명씩 내지 5명, 감고 1명, 봉군은 100명씩 배치되었다.

철마선돌

송정리 입석마을

철마선돌
철마선돌은 높이 3.96m, 폭 65cm, 평석직경 2.63m로서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돌이 세워져 있는 입석마을의 풍수지리가 배설로서 옛날 선여자를 지어 그 배의 돛대로 선돌을 세웟다고 전한다. 이 선돌은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 시대에 걸쳐 세워진 기장의 유일한 유물이다. 이 곳은 선돌이 서잇는 마을이라 하여 조선말까지 입석이라고 행정적으로 등재되었으나 우리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송정리로 개명되었다. 이 선돌의 동쪽 약 800m 지점에는 이 곳 입석리에 살고 있었던 부녀자들이 음력 삼월 삼짓날을 기하여 당년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고 사물놀이를 했던 곳이 있으며 그 주위에서 신라 토기들이 풍우에 의해 지면으로 노출되기도 했다.
이곳 입석마을의 선돌에 관해서는 풍수지리설과 연관된 전설이 있다. 입석마을은 처마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농촌마을로 그 북쪽 기슭은 백운산의 남쪽 기슭과 맞대어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이 지방의 지세가 배의 형국이라 하여 백운산에 선여사라는 배 선 자를 붙인 큰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배설의 중심지가 되는 곳에 배의 돛대가 되도록 선돌을 돛대처럼 높게 세웠다. 선돌이 의연하게 우뚝 솟아있는 한 이 마을은 순풍에 돛 단듯이 순조로와 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선여사는 없어지고 그 절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 선여사가 재건될 때 이 마을은 보배가 되어 보물처럼 소중한 곳이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는 거의 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넓은 분포에도 불구하고, 구조가 단순하고 대부분 단독으로 세워져 있어 유적으로서의 취약성때문에 이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기장척화비

기장읍 대변리 608번지

기장척화비
기장읍 대변리 대변수협지소 뒷편 노송 밑에 세워져 있다. 당초에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축항을 하며 그 밑 바다 속에 버려져 있었다. 해방 후 1947년경 마을 청년들이 인양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이 척화비는 고종 대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승리한 후 외국을 배척하고 쇄국주의를 고창하기 위해 전국 주요지 곳곳에 세웟던 것이다. 양산과 동래에도 있는데 양산 것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길이 4척 5촌, 두께 8촌 5분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비분은 전국적으로 똑같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으로 되어있다.

국수당(國師堂)

죽성리 두호마을 뒷산

국수당
400여년전 국가 기원제를 지내기 위해 조성된 국수대는 서해안과 이곳 두 군데에만 있는 것으로 기우제나 국가혼란시 기원제를 올리던 곳이다. 주관직경 30m, 높이 20m인 다섯 그루의 해송이 제당을 둘러싸고 있어 멀리서 보면 한그루처럼 보인다.
해방 후 지역민들이 이 곳을 당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국수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수당이 다른 당산과 구별되는 또 하나는 매년 당제를 올릴 때마다 제당에 돈을 넣는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부산경남 근교에서는 금정구와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옥정사(玉井寺)

달음산 자락

옥정사
4취봉산의 옥정사(玉井寺)는 달음산 자락에 자리한 긍해(亘海)스님께서 창건하고 환봉스님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달음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참배와 시원한 약소로 유명한 곳이다.
취봉산 취정사지(鷲峯山 鷲井寺地)
일광면 용천리 상곡마을에 있는 취정천의 시원이 되는 원효사 부근으로 북정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옛절터라고만 부르고 있고 취정사라는 말은 모르고 있다. 읍지에는 달음산에 있는데 이제는 폐락되었다고 되어 있고, 사대사찰 중에서 장안사보다 서열이 높다. 원효사 부근에 있는 논에서 옛 기와조각과 석상이 출토되어 학술조사도 하였다는데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옛날 이곳에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있어서 근래에 이 곳에 절을 지어 원효사라 하였다는 주지스님의 설명뿐이다.
달음산의 취봉기슭에는 이곳 외에 원동의 상리마을 뒤에 빈대절터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은 취정사라는 사명(寺名)과는 관련이 없다. 아무래도 취정천상류와 관련되는 사명(四名)인것 같은데 이곳 외에는 비정될 곳이 없다. 그런데 읍지에 취정사는 기장현청에서 동쪽 이십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취리동은 십오리로 되어있다. 취리동은 용천리의 대리마을이니 이 마을에서 상곡마을의 원효사까지는 오리가 되니 그 이정이 비슷하다. 이곳 주민들도 축정사, 추정사, 취정사 또는 이와 비슷한 절터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취정사는 큰 절이었고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사실과 취봉산에 있었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임란공신묘

기장읍 대변리 산 5번지

임란공신묘
아버지 김산수의 자는 군경(君卿), 호는 덕계(德溪)이다. 아들 김득복의 자는 진옥(振玉), 호는 동호(東虎)이다. 집안이 청도에서 살다가 경주지방으로 이사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자 가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처가와 외가가 울산과 인연이 있으므로 경주, 울산지역의 의병장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다. 7년 왜란의 무수한 전공으로 선조 38년(1605)에 아버지 김산수은 선무원종 삼등공신에, 아들 김득복은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특히 김득복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명나라 원정군의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하여 동호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임란공신 김득복의 묘는 죽성이나 대변에서 해안을 따라 2~3분정도 달리면 해안초소가 나오고 건너편 산을 오르면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행정번지를 굳이 따진다면 기장읍 대변리 산 5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우리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렬히 싸운 김산수 장군과 김득복 장군 부자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들 부자는 1562년 지금의 일광면 칠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득복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의 문천에서 각처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울산에 있는 반구동에서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결사동맹을 하였다. 이눌, 황희안과 대왕암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판관 박의장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왜적 4백여명을 참수하고 양산으로 진격하는 왜적 70명 또한 참수하였다. 10월에는 울산으로 가서 안시명, 윤홍명, 서충인, 장희춘, 권사악, 최계종, 박춘무, 안국보, 견천지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갑오년 3월에 불국사로 진을 옮겨 당교 아래에서 왜적 수백명을 무찌르고,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 울산 아산도역에서 김산수공이 순절하였다.
10월에는 견천지, 박이손, 김흥위, 김응택을 인솔하여 밤중에 고개를 넘어서 다시 당교에 가서 배 30척, 창, 화살, 쌀 등 무기와 군량미를 운반하여 왔고 병신년에는 권응수와 함께 말 19마리, 소 27마리, 군사 8백여명을 거느리고 창녕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영천에 가서 류백천을 도왔으며 또 팔공산에 가서 대첩을 하고 정유년에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곽재우 장군휘하에서 새 전공을 올렸다.
이렇든 울산지방에서 기병하여 양산, 동래, 언양, 경주, 대구팔공산, 영천, 금오산, 화왕산, 서생포전에서 전공을 올렸다.
공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고 의기가 높아 명장 마귀제독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하여 호장군이라 불렀다.
임란 후 선조 즉위 38년에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김산수 장군은 선무원종 삼등공신 가선대 부동지충부사, 김득복 장군은 선무원종 일등공신 가선대부동지돈녕부에 추종되었다. 장군은 8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인조 6년에 67세로 돌아가셨다. 장군의 묘는 울산염포에 있었는데 후에 이 곳에 이장되어 1977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이 재단장되었다. 또 약 370년의 세월이 흐른 1977년도에 10대손 일광면 칠암리에 거주하는 김진옥, 김성백씨 등이 그들의 가보에 得福宣武一等原從功臣墓在機張南山甘浦라는 글구를 보고 문교부에 공신 사실여부에 대한 조회를 한 결과 국사편찬위어ㅜㄴ회에서 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회보를 받았다.
기장군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장군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비지정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김산수, 김득복장군의 묘는 동해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이 곳에서 누워 우리의 동해를 지키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이 곳에 오면 바다와 산이 어우러지는 절경을 만끽하고 세상살이에 찌들린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오랑대(五郞臺)

오랑대
오랑대는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시랑 벼슬을 한 선비 5명이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기장읍성(邑城)

기장읍 동부리 310번지 일대

기장읍성
읍성은 동부리 310번지 일대로서 석축으로 된 성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 공민왕(서기 1356년)때 석축하였으며 둘레는 3.197척이고 높이는 12척이라 하였다.(실제 고려 공민왕때의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성 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동헌 옆에 그 우물이 있어서 학교 우물로서 근래까지 이용되어 왔다. 동헌자리는 높은 등성이에 있고 동쪽의 석축은 원형 그대로 있고 석축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읍성터라고 부른다. 남문은 대다리의 남문안, 남밖이라는 곳에 있었다. 동문은 동부리의 동문 안팎에 동문터라는 곳이 있다. 북문은 서부리의 북문안, 붕 밖에 북문터라는 곳이 있는데 서부리 82번지이다. 성내에는 공청으로 동헌, 차성관, 직면루, 조서루, 식파루, 장관청영방, 군기고 등이 있었고, 그리고 성문 밖에는 망풍정, 공진루, 관덕정, 빙고가 있었으며 구마지(현포교당앞)가 남아있다. 여제단은 만화리 여집골에 있었는데 임자 없이 홀로 떠도는 무주고혼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성황사는 북쪽 4리에 있었는데 이곳을 새마지(새직골)이라 한다. 이곳에서 토신과 곡물신을 제사하기 위하여 오색토로써 쌓은 5척의 사직단이 있다.

비석(碑石)

기장초등학교

비석
기장의 요소에 흩어져 새마을 사업으로 사라지고 훼손되는 것을 기장초등학교 앞으로 옮겨 놓았다. 선정(善政), 불망비(不忘碑) 등이 있다.

신라토성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웃마을 뒤편

신라토성
읍지의 고적조에 죽성고적은 두모포적상에 있다 하였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데 웃마을 뒷편 언덕을 옹산이라 하는데 이곳에 고적지가 있다. 이 옹산의 서쪽이 일직선으로 깎아질러 있다. 이 곳을 살펴보면 토축된 흔적이 완연히 남아있다. 신라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 축성되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이 토성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죽성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성지가 있었기에 고성지로 알려져 왓는데 근세에 이 고성 아래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염분리라는 법정리로 하였다. 고성지에 죽이 많이 자생하고 있으므로 성리라고 하기보다는 대 죽(竹)을 넣어 죽성이라 이름 지었다. 이 산 기슭에는 두모포영지가 있고 남쪽에 왜성이 있다.

이길봉수대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산 51-1 일대

이길봉수대
이 유적은 해안을 따라 침입해 오는 왜적들의 동향을 중앙으로 알리는 통신시설의 하나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되 일정하게 조직된 봉수망을 따라 전달되었다.
불빛과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가 정해져 있었고 비나 궂은 날씨로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뛰어가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전국의 봉수망은 크게 다섯 갈래의 원봉이 있고, 원봉에 연결되는 간봉이 있었는데 간봉은 주요 봉수망으로 각처의 군사정보를 알리는 곳이었다.
경상도 지역에는 원봉 34개소에 90개의 간봉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기장남산, 북쪽으로는 가리봉산의 봉화대가 연결되었으며, 경주지역을 거쳐 중앙으로 연결되었다.
봉수망은 고려시대에 정비되고 조선 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이 곳도 세종 때 봉화대를 만들던 규칙과 일치한다. 중앙의 봉돈은 높이 2.4m, 지름 9m의 돌로 쌓은 것으로 그 바깥으로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m 쯤의 돌로 쌓은 담장과 지름 40m 쯤의 담장이 바깥과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곳에는 오장과 봉졸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켰다.
각처에 남아있는 봉수대들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1987년 5월 19일 경상남도 도지정 기념물 제 84호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8호로 재지정되었다.
이길봉수대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은 1997년 국고보조사업으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되었다. 이에 따라 붕괴된 중앙 봉돈과 주변 내, 외 석축이 보수되었다.

장안사 대웅전

장안읍 장안리 598번지

장안사대웅전
불광산의 울창한 활엽수림과 계곡의 맑은 물이 감싸는 장안읍 598번지에 장안사가 자리하고 있다.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원효대사가 척판암과 함께 창건하여 쌍계사라 하였다가 신라 애장왕(서기 809년)때 장안사라 고쳤다 한다.
임진왜란 때(서기 1592년)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서기 1631년 인조 8년에 월조대사가 다시 중창하였고 서기 1941년 각현스님이 중수하였고 1987년 종각을 새로이 세우고 요사를 중창하고 단장하였다. 사신상이 버티고 서있는 대문을 지나면 정면에 석가여래 삼존불과 후불탱화, 신중탱화 등이 봉안돼 있는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충진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다.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팔각지붕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다포집으로 1995년 기장의 부산광역시 편입과 동시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7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인도등지에서 3차례에 걸쳐 들여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7기를 모시고 있는 3층석탑이 서있고 대웅전 뒤편으로는 대나무숲에 싸인 산신각이 있다. 향냄새가 그윽한 장안사를 뒤로 하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척판암으로 이어진 산길을 만날 수 있다. 30분 가량 올라가면 기암괴석 가운데 원효가 장안사와 함께 세웠다는 척판암이 있다.
원효가 이 곳에서 수도생활 도중 천안통으로 중국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이 무너지는 것을 알고 소반을 던져 대웅전에 있던 1천여명의 중국 승려들을 구했다는 전설에서 척판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용소골소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소로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 소로는 옛신라 갑화양곡현에서 기장현으로 개명되던 서기 757년 이전부터 우리조상들이 다니던 기장의 관문이며 유일한 교통로였다.
2천년 이상의 발자취를 가진 이 고갯길은 과거 기장지역에서 생산된 갈치, 미역, 해산물들을 동래와 송정 장터로 이어주는 수송로였으며 현감과 군수, 관찰사들이 부임하고 또 떠나던 길이다.
조선말 때 고을 백성들을 괴롭히던 어느 현감을 청년들이 상여틀에 묶어 저승가를 부르며 동문 밖으로 져다버린 오리를 징벌한 장한 길이기도 하다. 또 항일의 기운이 드높았던 기장의 민족 지도자들이 한일합방 후 이 고갯길을 넘어 망명의 길을 떠나면서 조국광복을 다짐했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이 소로가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기장읍 이장단의 보존건의로 지난 해 12월 허물어진 소로를 보수하고 소로 입구에 '역사보존비문'이 세워졌다. 공태도 기장군향토문화연구소장이 작성한 이 비문에는 소로의 역사 및 이에 얽힌 사연과 함께 '기장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옛길과 계곡의 자연을 잘 보호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으로 삼고자 한다'는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