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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기장군의 수난시대
 김산수(金山壽), 김득복(金得福) 부자(父子)
아버지 김산수의 자는 군경(君卿), 호는 덕계(德溪)이고 아들 김득복의 자는 진옥(振玉), 호는 동호(東虎)이다. 집안이 청도에서 살다가 경주지방으로 이사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처가와 외가가 울산과 인연이 있었으므로 경주·울산지역의 의병장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다. 7년 왜란의 무수한 전공으로 선조 38년(1605)에 아버지 김수산은 선무원종 3등공신에, 아들 김득복은 선무원종 1등공신에 봉해졌다. 특히 김득복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명나라 원정군의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하여 동호(東虎)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두 부자의 묘는 현재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다.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김일성(金一誠) 삼형제
이 삼형제는 기장현 하북면 예림방(禮林坊, 지금의 정관면 예림리)에서 태어났다. 첫째 일개의 자는 여강(汝剛), 호는 송미이다. 둘째 일덕의 자는 여경(汝卿), 호는 죽간(竹澗)이다. 셋째 일성의 자는 여빈(汝彬), 호는 채정(蔡汀)이다. 삼형제는 임진란 때 기장과 울산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후 선조 38년(1605)에 조정에서는 이들 삼형제를 선무원종 2등공신과 3등공신에 녹훈하였다. 현재는 철마면 와여리에 있는 의열사(義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신옥(辛沃), 신기운(辛起雲) 부자(父子)
신옥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부산진성의 정발장군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었다. 선조 25년, 왜군의 대병력이 부산진성을 공격하자 정발장군은 그 다음날 정오까지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그 날 신옥 공은 정발장군을 도와 좌충우돌 하면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항복을 요구하는 왜적에게 "내 목은 너희들이 칠 수 있으나 나의 무릎은 너희들 앞에 꿇지 못하겠다."고 대항하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 공의 전사소식을 들은 아들 신기운은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왜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부산진성으로 돌격하였으나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국에 붙잡혀 있는 동안 고국으로 탈출할 준비를 하여 6년 세월이 흐른 19살 때 몰래 조각배를 훔쳐 타고 왜국에서 탈출하였으나 왜적들에게 발각되어 조각배를 버리고 바다 속에 뛰어들어야했다. 며칠동안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중 마침 천행으로 우리 어선에 구조되어 부산포로 귀환하였다. 신기운은 평생에 동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한다.
 정팔동(鄭八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망칠 때 그를 따르는 군졸이 없었다. 결국 현감 혼자 남게 되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팔동은 비록 자신의 신분이 하인이었지만 현감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 왜병들이 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덤벼들자 정팔동은 상전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대항하였다. 왜병들도 정팔동의 의기에 감격하여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한다. 위험에 처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진실한 의사였다.
 오홍(吳鴻)과 오춘수(吳春壽) 종형제
오홍은 기장현 하서면 연구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치화(致化), 호는 연파(蓮坡)이고 23세 때 참봉으로 봉직하였다. 오춘수는 오홍의 종제(從弟, 사촌동생)로서 선조 6년(1573) 동래읍 북면 노포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죽강(竹崗)으로 종지품(從之品)의 무관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종제 오춘수로부터 전해들은 오홍은 의병을 모집하여 300여 명을 훈련시켰다. 오홍은 이들의 장수가 되어 먼저 기장현부터 수복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해 4월 20일 밤 오홍은 오춘수와 함께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사라동과 현청을 점령하고 있던 왜병을 급습하여 왜병 470여 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고 왜병을 도주시켰다. 이것이 오장군의 첫 승리인 사라동의 전과이다. 그 뒤 두모포(豆毛浦)에서 왜병들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의병부대를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구출된 의병들은 뜻밖에도 동향출신의 김일덕(金一德)이 이끄는 부대였다. 이것이 두 번째 두모포 전과였다.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南原城)의 적병을 기습하는 전투에서 32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조 41년(1608) 24별 전공신으로 동래 안락서원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오춘수는 선조 28년(1595) 서생포전투에서 전사, 후에 사상감 검정에 추종되었다.
 최개동(崔介同)
본래는 최개똥이라고 불렀다. 기장군 남면사람으로 몸집이 크고 용맹스럽고 힘이 센 장사였다. 왜병들이 근처 마을에 와서 노략질과 겁탈을 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왜병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그리고 읍내 내리마을 뒤에 있는 앵림산(지금 안적사가 있는 산)에 들어가 토막을 지어 숨어 살게 되었다. 이 무렵 기장주민들도 왜병을 피하여 이 산속에서 숨어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병들이 산 속까지 쳐들어와 숨어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하고 죽이는 일이 극심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 최개똥이 왜병들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사살하니 이에 겁먹은 왜병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였고 많은 피난민들이 개똥에게 의지하여 난리를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임금이 최개똥의 이름을 최개동으로 고쳐주고 공신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