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이 함께하는 곳, 기장
기장 죽성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쌓은 성으로 성벽은 3단, 성역은 총 39.929㎡, 성벽의 총 길이는 1km, 높이는 약 4m로써 전형적인 왜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죽성리왜성은 울산의 서생포왜성과 부산성을 연결하는 중간 요충지 역할을 하는 성이다.
기장현읍지에는 ‘왜성은 현에서 동녘으로 8리에 있으며 임진란 때 왜가 축조하였는데 견고하고 반원으로 통행하여 지나가도록 되어 있고 상하로 사닥다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에서는 ‘기장성’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기록에는 두모포성이라고 되어 있다.
일출 명소로 알려진 오랑대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이 지역의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기장 남산봉수대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기장 남산[일명 봉대산] 정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기장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바다의 상황을 파악하기 좋은 곳이다. 기장 남산봉수대가 건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인 985년으로 추정되며, 특히 13세기 이후 왜구들이 자주 해안에 출몰하면서 연변 봉수의 기능이 중요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1461년(세조 7) 이전에 기장 남산봉수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봉수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교리에 있던 기장읍성[현 기장 고읍성]이 고려 우왕(禑王)[1374~1388] 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관아가 모두 불에 타 버리자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기장읍성이 있는 곳으로 읍치(邑治)를 옮겨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世宗實錄)』에 1421년(세종 3) 9월 경상 관찰사가 기장현의 성내에 천수(泉水)가 없다고 하여 박곡리(朴谷里)로 옮기기를 청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1425년(세종 7)에 석축을 쌓은 기록이 있어 1421년에 읍성을 쌓을 것이 결정되고 1425년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공청(公廳)으로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객사(客舍), 사창(司倉), 인리청(人吏廳), 차성관(車城館), 직금루(織錦樓), 척서루(滌署樓), 식파루(息波樓), 장관청(將官廳), 영방(營房),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고, 성문 밖에는 망풍정(望豊亭), 공진루(拱辰樓), 관덕정(觀德亭), 빙고(氷庫), 구마지(漚麻池) 등이 있었다고 한다.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훼손되어 없어지거나 주택 담장으로 사용되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으나, 건물 하부에는 성벽의 기초가 잘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의 우물은 동헌 옆에 있었는데 근래까지 학교 우물로 사용했다고 하며,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기장 장관청(將官廳) 건물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현재 부산광역시는 동문 터, 남문 터, 남쪽 성벽 등을 복원하기 위해 주변의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있다. 1996년 5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송정리 입석마을 선돌은 기장군 철마면 입석리 입석마을의 평지에 위치하며, 6세기 무렵 만들어진 임기리 고분군(林基里古墳群)과 인접해 있다. 입석마을의 명칭 역시 선돌에서 유래하였다.
선돌은 높이 400㎝, 너비 80㎝이며 대석(臺石)은 길이 250㎝, 너비 190㎝, 두께 27㎝이다. 타원형의 편평한 대석 중앙에 사각형의 홈을 파서 선돌을 끼워 세웠다. 1995~1998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기장군 문화 유적 지표조사를 하면서 확인된 것으로, 선돌 외에 다른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송정리 입석마을 선돌은 언제 조성되었는지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대석(臺石)에 홈을 파고 세운 방식으로 보아 적어도 철기시대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장지역에 산재한 부사, 관찰사와 기장 현감, 군수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들을 한곳에 모아 1972년 기장초등학교 정문 앞에 조성하였으나 2004년 도로 확장 등으로 유실될 위기에 처하자 총 36기의 공덕비를 기장읍성 동문지 자리로 이전하였다. 1654년 부임하여 기장의 지경(地境)을 회복한 강유후 현감과 우리나라에서 종두법을 최초로 실시한 지석영 선생의 공덕비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개축비 2기, 기타 3기의 비석들을 전시 중이다.
기장 척화비(機張斥和碑)는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겪은 뒤 서양과 일본 등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할 굳은 결의를 나타내어 백성들에게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1871년(고종 8) 4월 서울과 전국의 중요한 곳에 세운 비석 중 하나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4㎝, 너비 52.5㎝, 두께 21㎝이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귀부와 이수(螭首) 없이 이전 복원할 때 설치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우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고 적혀 있다.
애초에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항만을 축조하면서 바다에 던져 버렸던 것을 1947년경 마을 청년들이 인양하여 대변항 어판장 뒤 주택가 축대 옆으로 옮겨 놓았다. 2005년 도로 개설로 현지 보존이 어려워 용암초등학교 옛 정문 왼쪽 화단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기장읍의 생활사를 담은 읍지(邑誌)에는 ‘죽성고적은 두모포진상에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웃마을 뒤편 언덕을 옹산이라 하는 이곳에 오래된 성지가 있다. 이 옹산의 서쪽을 일직선으로 깎아질러 보면 바로 토성이 있다. 이곳을 살펴보면 지금도 토축된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신라 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 축성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두호마을 서쪽 뒷산에 있는 죽성리 해송 사이에 당산 할아버지를 모신 제당을 국수당이라고 부른다. 국수당은 원래 국사당(國師堂)이며 국수당은 한자로 취음 표기된 문헌상의 기록이며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약 400년 전 국가기원제를 지내기 위한 국수대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매년 정월 보름날 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길 봉수대는 울산 서생포 방면의 군사 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봉수대로, 동쪽으로 하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가리산 봉수대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경주 지역을 거쳐 중앙으로 연결되었다.
각처에 남아 있는 봉수대들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1987년 5월 19일 경상남도 도지정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이길봉수대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은 1997년 국고보조사업으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사업이 시행되어 붕괴한 중앙 봉돈과 주변 내, 외 석축이 보수되었다.
최근 이길봉수대의 명칭이 잘못되었으므로, 이를 정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에 있는 나사(羅士)봉수대가 원래의 이길봉수대고, 현재 효암리 뒷산에 있는 이길봉수대는 아이봉수대로 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아이봉수대를 현재 이길봉수대로 혼동하게 된 이유는 『대동여지도』에 있었다. 『대동여지도』에는 아이봉수대가 임랑포보다 남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현재 효암리 뒷산의 봉수대는 이길봉수대로 비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길봉수대, 아이봉수대, 나사봉수대의 상호 관계를 비교 검토하는 연구가 시급한 실정이다.
옥정사(玉井寺)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의 달음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07년에 승려 박긍해(朴亘海)가 고향에 1835년(헌종 1)에 창건된 옛 절터에 다시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현재 옥정사 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설법 보전, 약왕각, 지장전, 칠성각, 산신각, 범종각 등의 전각이 있으며, 진신 사리를 모신 삼층 석탑과 약사여래불 입상이 세워져 있다.
장안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3년(673)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며, 대웅전은 김방한의 ‘장안사대웅전기’(長安寺大雄殿記)와 근래에 발견된 ‘묵서명’으로 인해 건물의 중건 및 중수연대가 명확히 규명된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다포식 건축물이다.
장안사는 신라 시대인 673년(문무왕 13)에 원효가 척반암과 함께 창건하여 쌍계사라고 하였다가, 애장왕(809년)이 다녀간 후에 임금님이 오랫동안 푹 쉬다간 절이라 하여 장안사(長安寺)라 개칭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1638년(인조 16) 중건했다. 1987년에는 종각을 새로이 세우고 요사채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등이 있다. 사천왕상이 서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충진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있다.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8월 6일 보물로 승격되었다.
임란공신묘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렬히 싸운 김산수(金山壽) 장군과 김득복(金得福) 장군 부자(父子)의 묘소를 말한다. 이들 부자는 임란 후 선조 즉위 38년에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김산수 장군은 선무원종 삼등공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득복 장군은 선무원종일등공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에 추종되었다. 장군은 8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인조 6년에 67세로 사망했다. 묘는 울산 염포에 있었는데 후에 이곳에 이장되어 1977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이 재단장되었다.
용소골 소로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신라 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 백성들이 다니던 기장의 관문이었으며 유일한 교통로였다. 과거 기장에서 생산된 갈치 미역 해산물들을 동래와 송정장터로 이어주던 수송로였으며 고을 백성들을 괴롭히던 어느 현감을 청년들이 상여틀에 묶어 저승가를 부르며 동문 밖으로 던져버린 징벌의 길이기도 하다. 항일운동이 한창일 때는 기장의 민족지도자들이 망명을 떠나며 조국 광복의 다짐을 했던 길이기도 하다.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이러한 역사가 담긴 기장 옛길이 점차 잊혀 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기장읍 이장들의 건의로 허물어진 소로를 보수하고 소로 입구에 ‘역사보존비문’이 세워졌다. 향토사학자인 공태도 선생이 작성한 이 비문에는 소로의 역사 및 이에 얽힌 사연과 함께 ‘기장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옛길과 계곡의 자연을 잘 보호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으로 삼고자 한다’는 복원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