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의 역사와 문화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이 함께하는 곳, 기장

기장의 역사인물
일제강점기 기장과 기장 정신
  • 구수암(具壽岩) 1901~1920
    구수암은 기장면 동부리에서 1901년 출생했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의 신문기자였던 김수룡이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최기복, 이택규, 박공표, 오기원 등 기장 지역의 청년들에게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들은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뒤, 4월 5일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민족’과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기장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3·1운동을 주도하였다. 구수암은 시위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형이 선고되어 대구감옥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수감 중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어 가출옥하였으나 출옥 15일 만인 1920년 5월 1일에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구수암의 장례는 명정의숙 여학생들이 주도하여 면민장으로 진행되었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권은해(權銀海) 1903~1994
    권은해는 1903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권상중과 강처일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권상중은 기장 지역의 부유한 지주로 기장의 첫 사립학교인 보명학교와 명정의숙을 설립하고 기장광복회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인 권인후 역시 가렴주구를 일삼던 기장 현감을 파직시킨 인물로 권은해는 강직한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물려받아 점차 항일민족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명정의숙의 교장이었던 박세현은 기장광복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18년 사망한 인물로 권은해의 민족의식 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9년 기장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잠시 상경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권은해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구수암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는 데 앞장서며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양산 출신의 이상복과 결혼하며 양산 지역을 주 무대로 양산청년회, 양산부인회와 근우회 양산지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는 부산을 무대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조선혁명자구원회, 부산부녀동맹, 남조선노동당 경상남도당 산하 부산여성민주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1948년에는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에 양산군 대표로 참여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6·25전쟁을 계기로 월남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떠돌며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67년 석방되어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와 은거하다 1994년 7월 7일 91세의 나이로 기장면 서부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 김도엽(金度燁) 1899~1937
    김도엽은 1899년 기장면 대라리 436번지에서 태어났다. 김두엽 친동생 김규엽은 기장 지역 노동 운동과 청년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가 김두봉, 김약수와도 친척 관계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김원봉의 아내인 박차정과도 친척(내재종형제: 할아버지 여자형제의 손자) 관계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김도엽은 사돈 관계였던 권은해의 아버지가 설립한 보명학교를 다니며 항일의식을 더욱 키워나갔는데 결국 1917년 기장광복회 사건으로 박세현, 오기원 등과 함께 구속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후 기장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김수룡, 권철암, 구수암, 최기복, 이택규, 박공표, 오기원 등의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벌이고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김약수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에 가입하고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러시아로 유학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 및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기장에서 활동하다 적색노동조합 운동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공판을 기다리다가 폐병으로 출옥하여 공판 정지를 받았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구금과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1937년 사망하였고 정부에서는 김도엽의 이러한 공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두봉(金斗奉) 1889~1960
    김두봉은 1889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가 기호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 재학 시절 안희제, 남형우, 윤세복 등과 대동청년단이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적발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아 한글연구에 집중하였다.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3·1운동에 참가한 뒤, 신의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인 상해에서 한글연구와 교육, 문화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1922년에는 『깁더 조선말본』을 펴내기도 했다.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이후, 적극적인 항일 민족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어 의열단장 김원봉과 함께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시행하였다.

    김두봉은 1889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가 기호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 재학 시절 안희제, 남형우, 윤세복 등과 대동청년단이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적발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아 한글연구에 집중하였다.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3·1운동에 참가한 뒤, 신의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인 상해에서 한글연구와 교육, 문화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1922년에는 『깁더 조선말본』을 펴내기도 했다.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이후, 적극적인 항일 민족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어 의열단장 김원봉과 함께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시행하였다.
  • 김약수(金若水) 1890~1964
    김약수의 본명은 김두전(金斗全)으로 1890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김은홍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한글학자이자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였던 김두봉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서울의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김원봉, 이여성 등과 같이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다가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창설하고 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입학한 뒤, 박열(朴㤠), 장상중(張祥重)과 함께 흑도회 결성 후 다시 북성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하다 1922년 귀국하였다. 1925년 조동우, 정운해, 김종범, 신철 등과 함께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 승인을 받았으나 1926년 체포되어 1931년까지 복역하였다.

    광복 후에는 좌익노선을 탈피하여 한국민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탈당하여 중도파인 김규식의 민중동맹 창설에 참여하여 중간파 노선을 취하였다. 1948년 5·10총선거에 출마하여 경상남도 동래구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9년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출옥 후 월북하여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인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당에서 축출된 후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어 결국 196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 박세현(朴世鉉) 1897~1917
    박세현은 1897년 기장면 서부리 16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장 최초의 사립학교인 명정의숙 교장을 맡아 여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명정의숙의 교가와 교육 내용은 애향심과 민족애를 높이는 내용으로 학생들의 항일의식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1914년에는 김약수, 박우돌, 이오은 등과 함께 기장광복회를 조직하였는데 기장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아 항일운동에 도움을 주었고 여기에는 기장 제일의 갑부로 불리던 권상중과 최신언 등이 함께하였다. 결국, 1917년, 기장광복회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박세현은 동년 부산감옥소에서 순국하였다. 이후 1919년 기장 지역 3·1운동 당시 명정의숙과 보명학교 출신 청년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 박순천(朴順天) 1898~1983
    박순천은 기장면 대변리에서 1898년 박재형과 김춘열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명련이며 순천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도피 생활을 하며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선교사의 추천으로 부산진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마산에 있는 의신여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다 마산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3·1운동 참여 경력이 빌미가 되어 마산으로 압송되어 1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다시 도쿄에 있는 일본여자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한 뒤, 같은 일본 유학생 변희용과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각종 농촌 계몽 활동에 전념했다.

    광복 이후에는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고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 대한부인회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0년 서울 종로에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당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반대하며 자유당 정권과 투쟁을 지속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동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여 1963년 7월 창당대회에서 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한 박순천은 근명 학원 이사장, 중앙여고 이사,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3년 사망하였다.
  • 박영출(朴永出) 1907~1938
    박영출은 1907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박인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출의 가문은 기장의 대지주로 기장광복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박인표와 기장 3·1운동을 주도했던 숙부 박공표, 양산청년회 회장으로 동경 2·8독립선언에 가담한 외숙부 김철수 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안이었다. 박영출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아 동래고보에 재학 중이던 1925년에 학생동맹휴학을 주도하여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결국 1926년 2월에 이른바 ‘장산 촛불 시위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졸업 1개월을 앞두고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박영출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1931년, 방학을 맞아 귀국한 박영출은 동래 수안동 광장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는 강연을 한 사건으로 인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영출은 서울로 올라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울산 출신의 이관술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영출은 이관술, 이재유 등과 함께 경성재건그룹 노동 운동을 총괄하다 은신처에 잠복해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는데 그의 죄목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비밀결사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여 각 공장의 동맹파업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193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1938년 8월, 31세의 나이로 결국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박용선(朴容善) 1904~?
    박용선은 1904년 기장면 대라리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사립 보명학교를 졸업하고 동향인 김약수의 소개로 1924년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25년에는 고려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기장 출신인 김도엽과 함께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이수하고 1930년, 고국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용선은 조선공산당 재건 임무를 부여받고 부산과 양산의 공장지대의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당 재건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특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태일상회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수익금 대부분을 김약수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지부 부위원장,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월북하여 1955년 소련·조선 문화협회 서기장과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60년에는 북한·소련 친선협회 대표 단장으로 소련 노동절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 오기원(吳基元) 1897~1940
    오기원은 1897년 기장면 대라리 437번지에서 오경천(吳敬天)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보명학교를 졸업하고 기장에 있는 차성상회의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비밀 결사인 기장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기장광복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김도엽, 오신근 등과 함께 심문을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1919년 기장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장면 교리 출신의 김수룡이 서울에서 제작된 독립선언서를 오기원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최기복, 이택규, 박공표 등에게 전달했고 이들은 4월 5일 기장 장날 11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장관청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거사를 주도하였다. 이후 경찰에 체포된 오기원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며 순회강연 등을 통해 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교육 사업에도 전념했다. 오기원은 1940년 사망하였으며 199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오태환(吳泰煥) 1897~1940
    오태환은 승정원 승지를 지낸 오진근의 장남으로 1884년 기장읍 철마면 와여리 224번지에서 출생했다. 오태환의 집안은 ‘철마오부자’ 혹은 ‘영남 3대 갑부’로 불리는 대지주 가문으로 오태환은 이러한 가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민족 자본 육성을 통한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2년 부산초량에서 설립된 구포은행(현 경남은행) 대주주 및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기장 출신 박인표와 함께 1918년 동래 복천동에서 설립된 동래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창립 이사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특히 오태환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성전문학교, 철마사립보통학교 설립에 관여했으며 동래고등학교 부지 공사에 600원의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동래일신여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처하자 약 약 45만 평에 달하는 전답을 매각해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동래일신여학교는 1940년 5월 30일 동래고등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새롭게 개교했으며 오태환은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처럼 오태환은 부산 및 기장 지역의 교육 운동에 헌신하다 1948년 8월 1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 자리해 있다.
  • 권동수(權東銖) ?~?
    권동수는 기장읍 동부리에서 출생했다. 증조할아버지는 권인후이며 할아버지는 명정의숙과 보명학교를 설립한 권상중이다. 같은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은해와 권복해가 고모이며 김약수는 외종조부, 사회주의자 박용선은 칠촌 재당숙이다. 김도엽과 김규엽 형제는 권동수의 외삼촌이다.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동래소년도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때 만들어진 ‘적기회’의 조직선전부 일을 맡으며 기관지인 『적색 뉴스』를 회원들에게 배부하였다. 1931년에는 단체명을 ‘동래반제전위동맹’으로 변경하고 제국주의 전쟁 반대와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1932년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인 1934년 ‘공장연구회’와 ‘부산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경상남도 대의원으로 참가했으며 1946년 남로당이 결성되자 권은해와 함께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이른바 백색테러의 대상이 되어 서북청년단 등의 단체에 큰 피해를 당했다. 결국, 권동수는 1948년 경찰과 이들 단체의 탄압을 피해 종적을 감췄는데 이후 생사는 알 수가 없다.
  • 김태엽(金泰燁) 1902~1985
    김태엽은 1902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출생했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2년 재동경 조선노동동맹을 결성하여 교포 노동자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당시 일본 형사들은 이런 김태엽에게 일본어로 ‘돗빠(돌파, 突婆)’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1944년 귀국하여 노동 운동과 노동자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부산지구 초대 위원장, 혁신당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80년대에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 고문을 역임했으며 1985년 5월 6일 사망했다.
  • 박세용(朴世用) 1907~1935
    박세용은 1907년 기장면 서부리 163번지에서 출생했으며 기장광복회 총무와 명정의숙 교장을 맡았던 박세현의 사촌동생이다. 193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1932년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복막염과 폐결핵으로 1935년 6월 가석방 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8월 12일, 29세의 짧은 나이로 사망했다.
  • 오신근(吳信根) ?~?
    오신근은 기장면 대라리에서 오진영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오신근은 일찍부터 항일 및 기독교 사회활동에 앞장서 기장기독청년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기장여자야학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또한 기장광복회 활동을 하며 자금 모금을 하다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19년 기장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는 대중계몽운동에 집중하여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강연활동을 했다. 1922년 기장 유지들의 발의로 동부리노동야학에서 기장노농혁신회가 설립되었는데 오신근은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 이도윤(李道胤) 1923~2013
    이도윤은 1923년 기장면 동부리에서 출생했다. 1940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5학년 재학시절 발생한 이른바 ‘부산항일학생의거’에 참여하고 주도하였다. 일명 ‘노다이 사건’으로 잘 알려진 부산항일학생의거는 1940년 11월 23일 서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에서 일본인 노다이 심판장이 조선인 학교를 차별하는 판정을 내린 것에 불만을 가진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시위를 말한다. 경기장을 나선 학생들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며 노다이의 집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20명이 검거되고 그중 주모자 15명이 투옥되었으며 이들 중 2명은 결국 옥고로 사망했다. 이도윤 역시 검거되어 8개월의 옥살이를 치렀다. 출옥 후 이도윤은 고된 옥살이의 후유증을 겪다 만주로 떠나 광복 후, 고향인 기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201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장봉기(張琫起) 1902~1997
    장봉기는 1902년 기장읍 대변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기장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주요 인물 중에서는 최연소자였다. 장봉기는 김수룡,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최기복, 이택규, 박공표, 오기원 등의 기장 청년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장봉기는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에는 민선 기장 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97년 3월 10일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군민장으로 치러졌다.
임진왜란과 기장
  • 고려 말, 왜구의 창궐로 전 국토가 괴로움을 당했는데 기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은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통해 일본을 회유하기도 하고 강경하게 대응하기도 했는데 삼포개항을 통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 1510년의 삼포왜란, 1544년의 사량진왜변, 1555년의 을묘왜변이 연달아 발생하며 결국 조선과 일본은 단교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다이묘들의 할거로 오랜기간 전국시대를 겪었는데 결국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후,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 의해 전국 통일이 이루어지며 전쟁의 기세를 외부로 확장하게 되는데 첫 번째 공격대상은 이웃 나라 조선이었다.

    결국,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약 18만 명이 부산포를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공격으로 초기 조선군의 방어체계가 무너지면서 부산의 동래성이 함락되고 일본군은 기장을 공격하였다. 압도적인 군세로 기장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 기장, 창원, 김해, 양산, 밀양 지역에 진지를 구축해 장기간의 전투에 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장에도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과 임랑포왜성(林浪浦倭城)을 쌓았다. 이후 1599년 기장 현은 결국 폐현이 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617년 복현이 되었다.

    이처럼 기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어느 지역보다 큰 피해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당시 기장 사람들은 이러한 국란은 이겨내며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불굴의 저항 정신을 보여줬다. 이처럼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선 정부는 선무공신(宣武功臣)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두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했으며 이들에게는 모두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지급해 관직과 음서(蔭敍)의 혜택을 주었다.
기장의 임란공신
  • 김일개(金一介) 1562~1629 · 김일덕(金一德) · 김일성(金一誠) 삼형제
    이들 형제는 기장현 하북면 예림방, 즉 지금의 정관면 예림리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기장과 울산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5년에 장남 김일개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봉해졌고 차남인 김일덕은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이후 영조 대에 김일개와 김일덕은 병조참의로 증직되었고, 충렬사에 24별전공신으로 배향되었다.
  • 김산수(金山壽) 1541~1597 · 김득복(金得福) 1567~1633 부자
    이들 부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경주, 울산 지역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 김산수 의병장은 당시 훈련원정을 지냈으며 울산 학성(鶴城)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아들인 김득복은 당시 절충장군 상호군(折衝將軍上護軍)이었으며 양산, 동래, 언양, 경주, 대구, 영천, 금오산, 화왕산, 서생포 등지에서 전공을 올렸다. 1605년 김산수는 선무원종 삼등공신, 김득복은 선무원종 일등공신으로 추증되었다.
  • 신옥(辛沃) ?~1592 · 신기운(辛起雲) 1579~1642 부자
    신옥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의 정발 장군 휘하에서 종군 중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포로로 잡힌 신옥은 일본군의 항복 요구를 무시하고 장렬히 순절하였다. 당시 13세이던 아들 신기운은 부친의 전사 소식을 접하고 부산진성을 공격하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7년 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신기운은 부산포로 귀환한 뒤 한강 정구(鄭逑)선생에게 수학하며 평생 일본 땅이 있는 동쪽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신옥은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 신기운은 승사랑(承仕郎)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증직되었다. 이들 부자는 직계 후손인 월천 신오 선생과 함께 정관면에 있는 다산단(茶山壇)에 함께 모셔져 있다.
  • 김윤룡(金潤龍)
    김윤룡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정2등에 봉해졌고 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임란 후에는 절충장군으로 동래 다대포진 수군절도사와 부산진 병사를 겸했다. 그의 묘는 정관면 병산리 박달산에 있으며 손자인 오정(鰲亭) 김방한(金邦翰) 선생과 함께 이현사(二賢祠)에 모셔져 있다.
  • 오홍(吳鴻) 1566~1597 · 오춘수(吳春壽) 1573~1595 종형제
    오홍은 기장현 하서면 연구동 출생으로 23세에 참봉에 올랐다. 오춘수는 오홍의 사촌 동생으로 동래읍 북면 노포동에서 출생하였고 종6품의 무관이었다.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오춘수에게서 들은 오홍은 오춘수와 함께 의병을 모집해 기장읍 서부리 용소계곡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후 두모포에서는 동향(同鄕)의 김덕일이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발발 후, 오홍은 남원성 전투에서 적병을 기습하다 32세의 나이로 전사하였으며 동래부사 이안눌의 주청으로 24별전공신으로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종형제 오춘수는 1595년 서생포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이후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추종되었다. 두 사람은 해주오씨 재실이자 사당인 구산단(龜山壇)에 모셔졌다. 구산단은 숙종 대에 의용(義勇)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의용단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 이청춘(二靑春) ?~1592 · 이응원(李應元) 1556~1640 부자
    이청춘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과 동래성 전투에서 싸우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응원은 이청춘의 아들로서 1556년 일광면 청광리 덕발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양산 정진암(停陣岩)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 3등에 봉해졌으며 1640년 사후,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생전 이응원은 아버지가 전사한 남쪽을 향해서는 좌정하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묘소는 일광면 용천리 산수곡에 자리하고 있다.
  • 정팔동(鄭八同)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인접한 기장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기장 현감은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삼성리로 후퇴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사들 대부분이 도망가버렸다. 이에 한양으로 가고자 했던 현감을 호위할 병력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오직 노비 신분의 정팔동만이 현감을 호위하며 결사적으로 싸웠고 일본군은 이런 정팔동의 충의를 아껴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았다고 전한다.
  • 최개동(崔介同) 1573~1594
    최개동은 1573년 기장현 남면에서 태어났다. 동래성이 함락시킨 일본군이 기장으로 진격해 기장읍성마저 함락되자 최개동은 가족과 함께 안적사가 있는 앵림산으로 피신했다. 기장에 주둔한 일본군이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학살과 약탈을 일삼자 최개동은 평소 가지고 다니던 활로 일본군을 사살하며 항전을 펼쳤다. 이후 최개동을 잡기 위해 앵림산으로 들어온 본대마저 소탕하며 기장 지역의 백성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결국 최개동은 1594년 10월 15일 일본군과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러한 최개동의 공을 기려 병조 참판으로 증직하였다. 최개동의 묘소는 기장군 기장읍 산27-9번지에 있으며 후손들이 해마다 묘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