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의 역사와 문화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이 함께하는 곳, 기장

기장의 무형문화재
부산 기장 오구굿
  • aaa.png
    무형문화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2014.01.01(지정일)
    부산 기장 오구굿은 죽은 사람의 혼을 천도하는 위령마당굿(천도제)으로 집안굿, 방안굿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부정굿부터 시석까지 총 열두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염불이나 고삼, 자삼, 가락 등 불교적인 내용과 색채가 짙게 혼융되어 있어 불교의 재(齋) 양식과도 비교 가능한 독특함을 띄고 있으며, 한국인 특유의 사생관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해원과 축원의 사설풀이와 함께 노래, 춤, 각양의 조형형상으로 살풀이의 극점인 신명을 불러 일으켜 죽음을 맞이하고 망자를 보내는 한국 샤머니즘 특유의 생명사상과 가무정신을 지니고 있어 민족적 무의식과 미의식의 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예술유산이자 한국문화의 보편성과 함께 지역 단위의 독특한 특징을 지니는 중요한 전통문화로 무형문화재 지정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무의 및 무가 보유자 김동언은 확실한 전승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오구굿 의식절차, 내용, 양식에 관해 두루 능통할 뿐 아니라, 오구굿 특유의 사설풀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빼어난 기예를 갖추고 있으며, 악사 및 지화제작 보유자 김동렬은 음악연주와 장단에서 김동언과 짝을 이루고 있으며, 지화, 용선, 무구 등의 제작에 두루 능통하여 모두 보유자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주성장(鑄成匠)
  • bbb.png
    무형문화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2004.10.04(지정일)
    주성장이란 쇠를 녹여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원하는 물품을 만드는 주물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 주성장은 군기감이나 주자소에서 무기나 금속활자를 만드는 경공장이 중심이었다. 영·정조시대 이후 공장안이 폐지되자 17세기부터 개인적인 경영을 하는 사장(私匠)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18세기에 들어 사찰의 범종, 금고, 향로, 시루 ,주자 등의 수요를 담당하였고, 19세기부터는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절에는 주성장의 맥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으나 오히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물자 제작으로 인해 주물의 수요가 늘어나 점차 부활하였다.

    주성장 기능보유자 박한종은 16세에 주성장계에 입문하여 약 50년간의 오랜 경력을 가진 범종주성장이다. 부산지방의 주성장으로는 일제강점기에 부산을 본거지로 범종사(梵鐘社)를 세워 활동한 주성장 김석곤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석곤의 주종기술은 20세기 초 활동한 김쾌재와 청종사(靑鍾社)를 운영한 김석정에게로 이어졌으며, 박한종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주종기술을 전수받았다. 1987년부터는 스승 김석정의 주종공방을 물려받아 홍종사(弘鍾社)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그 동안 1천관 미만의 동종 200여구와 2천관 이상의 대종 10여구를 주성하였다. 2천관 이상의 대표작으로는 청도 대국사 대범종(1991), 부산시민의 종(1996), 김천시민대종(1999), 김해 은하사 신어범종(2001), 수원 봉녕사 대범종(2002) 등이 있다.

    박한종이 동종을 주성하는 방식은, 종신 단면의 절반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거대한 회전축을 이용하여 내형과 외형의 주형틀을 각기 따로 제작 조립하여 주조하는 우리나라 종의 전통기법인 사형주조공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더욱이 제조기법이 명확하지 않았던 상원사종의 정밀주조기법을 전통적인 사형주조방식으로 재현하여 우수한 소리와 문양의 아름다움으로 극찬 받는 한국종의 신비로움을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사기장(沙器匠)
  • ccc.png
    무형문화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2005.03.03(지정일)
    사기장이란 여러 가지 흙을 혼합하여 1,300℃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사기그릇을 구워내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사기장 보유자였던 故 김윤태는 문경사람으로, 문경은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적토, 백토, 사질점토, 도석 등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계곡의 물이 좋아 1700년경 영․정조시대의 공장안 폐지에 따라 문경새재를 넘어온 장인들이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가마가 만들어졌으며, 찻잔과 반상기를 주로 제작하였다. 문경의 갈전요(葛田窯)는 김윤태의 조부가 운영했던 가마로 해방 후 한국전쟁기까지 몇 년의 공백이 있었으나 김윤태의 숙부 김종성이 계승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자기 생산은 관에서 운영하던 분원자기(分院磁器)와 조선 후기 전국 각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영자기(民營磁器)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중 민영자기는 임진왜란 당시 숙련된 사기장이 일본으로 납치된 지역(낙동강 연안 및 전라도 연해안 지방)과 납치를 모면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김윤태는 납치를 모면한 민수용도자기의 대표적 산지인 경북 북부 지방의 가마전통을 계승하였다. 김윤태는 조부 김일배와 숙부 김종성으로부터 조선 말기 가마를 완전히 계승하여 평생 도자만을 제작하였다. 특히 생활자기 분야 중 식기류(사발류)는 대접, 사발, 바라기, 입기(立器), 탕기(湯器), 발탕기(鉢湯器), 보시기, 합보시기(合甫兒器), 차종(茶鐘), 종지(鍾子), 종발(鐘鉢), 접시 등이 뛰어났다.

    이들은 기형상으로 조선 말기 지방 가마의 특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고, 굽도 규석받침․태토비짐받침 등 전통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아울러 질흙 채취, 톳물 받기(水飛), 그릇 모양 짓기(成形), 굽깎기, 끌목, 잿물구이, 고사 등의 모든 제작 과정이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생산양식을 따르고 있다. 김윤태는 질흙을 파오는 일, 수비, 수비된 질흙 반죽과 기포 빼는 일, 물레에 올릴 질흙뭉치인 꼬박 만들기, 성형된 그릇의 흠을 닦아 보완하는 물메질, 유약 바르는 일 등 백자 제작의 모든 허드렛일을 하는 수중군의 역할은 물론, 사발대정(造器匠), 굽대정(磨造匠), 잿물대정(着水匠), 불대정(覽火匠), 도화장(畵靑匠) 일까지 전 과정을 혼자서 담당하였다.

    전국에서 백자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미미한 실정에서 김윤태는 이를 모두 소화하였고, 특히 망뎅이(또는 망생이)로 만드는 전통 가마제작 기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윤태의 장남인 김영길은 어릴 때부터 부친의 전통기법 뿐만 아니라 망생이를 이용한 가마 축조 및 물레 제작 등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 전통 백자 제작의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혼자서 처리하는 등 기능이 뛰어나 2015년 3월 사기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